이어서 두번째 글 올라갑니다.
인천 야구 전성기 구가한 숭의구장
이 운동장에서 실력을 연마해 인천의 명성을 드높인 것은 인천상업 야구팀이었다.
비록 일본인 위주의 팀이었지만, 이기영, 이호직, 김영택 같은 선수들이 크게 활약
하였고, 김선웅, 장영식 선수는 조선 대표로 일본 갑자원대회에 출전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일제는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야구를 영미귀축(英美鬼畜)의 운동
이라며 중지시켰고, 심지어는 식량을 증산한다며 소화고녀(昭和高女 ㆍ 지금의 박
문여고) 학생들을 동원시켜 야구장에 콩과 고구마를 심는 등 광기를 부리다가 물러
났다.
야구 경기를 재개한 것은 광복 후인 1945년 9월 중순이었다.
우선 콩밭을 야구장으로 환원시키는 한편 체육인 정용복 선생의 주선으로 미 공병
대와 보수작업을 했고 운동장 최씨가 마지막으로 번듯한 백색 라인을 그어 야구장
을 우리 품으로 돌아오게 했다.
인천 주둔 미군과 급조한 전 인천군과의 대결이 첫 경기 였는데 그를 계기로 미 항
만사령부와 에스컴사령부는 볼, 배트, 클럽 등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등 인천 야구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인천고와 동산고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야구대회인 청룡기와 황금사자
기 대회 등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수년간 전국을 제패해 인천 시민들을 열광
케 했다.
인천 시민들은 야구사랑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런 토양 아래서 2004년 5월 인
천고가 야구부 창단 100년 만에 중앙일보 주최 제38회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해 대통령기를 차지한 것은 인천 야구의 부활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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